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의 소설가, 수필가, 언론인이다. 작품 대부분은 매우 영향력 있는 수작 평가받으며 문학 평론가들은 그를 세계문학에서 가장 위대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꼽는다.
그의 작품은 19C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정신적 문제에 있어 인간의 상태에 대해 탐구,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주제를 논하고 있다. 그의 소설로는 죄와 벌(1869), 우자(1869), 악마(1872) 카마마조프 가의 형제(1880) 등이 있다. 그 중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실존주의 문학의 첫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그의 유년 시절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11일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다. 자선 병원 의사인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와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사이에 7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그 당시 러시아에서 의사는 중인 계급으로 집안은 넉넉치 않았고 아버지는 매우 권위주의적이고 거친 성격으로 자식들은 그를 두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니는 1834년 열 세 살,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의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다. 아버지와 대조적으로 온화하고 자애로웠던 어머니는 1837년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큰 충격에 휩싸였고, 그의 아버지는 같은 해 장남 미하일과 열 여섯살이 된 차남 도스토예프스키를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상트페테프부르크로 보냈다.
1838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예민하고 병약했던 소년에게 엄격한 군사 훈련은 맞지 않았고, 그에게 문학은 유일한 위안으로 다가왔다. 그는 틈틈이 문학에 대한 열정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습작 나누며 논쟁을 벌이곤 하였다. 당시 낭만주의 사조가 유행했던 시기로서 그도 프리드리히 실러에 빠져 있었다.
1839년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가 영지의 농노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는 아내와 사별한 후 영지로 내려가 지내고 있었는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었던 것이 죽음의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페테르부르크에 있던 형제는 큰 충격에 휩싸였으며, 전기 작가 O.밀레르에 따르면 토스토예프스키를 평생 괴롭혔던 간질 발작이 이때 처음 나타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1841년 도스토예프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 육군성 제도국 소위로 임관되었으나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1844년 10월에 제대하게 된다.
그의 문단 데뷔
그는 어릴적 부터 유모를 통해 영웅적 사가와 동화, 전설 등을 접해 왔다. 그가 네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읽고 쓰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성경을 애용하였다고 한다. 그의 부모님은 러시아 작가 카람진, 푸시킨, 델자빈 등 폭넓은 문학과 작가드클리프의 작품 등 고딕 소설, 쉴러와 괴테의 로맨틱한 작품, 미겔 데 세르반테스와 월터 스콧의 영웅적인 이야기, 호메로스의 서사시 등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의 교육 방식이 매우 엄격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은 부모의 야간 독서를 통해 그의 상상력이 활용되었다고 보고 되고 있다.
도스예프스키는 1846년 <가난한 사람들> 첫 작품으로,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에 의해 제 2의 고골'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데뷔 하기 전 그의 작품을 직접 건네 받아 읽었던 니콜라이 네크라소프는 그의 글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한 밤 중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을 찾아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다만 이 발표한 <백야>와 <분신> 등은 혹평을 피하지 못했는데 이 때부터 서구주의 사상에 끌리고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하는미하일 페트라솁스키의 모임에 가담하게 된다.
그의 수난
젊은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트라솁스키를 주축으로 한 젊은 지식인, 작가 등과 함께 공상주의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급진적인 정치모임에 참가한다. 그 당시 러시아의 황제였던 차르 니콜라이 1세는 정치 모임에 첩자를 들여보내 이들을 감시하였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모임에서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절대 왕정을 신봉했다는 이유로 고골을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당시 불온문서로 간주됨)를 낭독한 것이 이유가 되어 1849년 4월 당국에 의해 체포 되었다.
니콜라스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사형에 처할 생각을 아니었으나,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 모임들에게 경고하고자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도스토예프스키와 회원들은 총살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형 집행이 중지되고 시베리아에 유형을 가는 것으로 감형처리 되었다. 애초에 특별사면할 계획으로 사형을 선고하였던 것이었으나 이를 알 리 없었던 그들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던 생각에 몇몇 사람은 공포와 충격으로 머리가 하얗게 세 버렸다고 한다. 이같은 그의 경험은 <백치> 등의 작품에 사형 집행 직전의 심정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등 그의 작품 세계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된다.
당시 시베리아 유형은 감옥 수형과 출소 후 시베리아에 남아 복무하는 것으로 구성되었는데, 그는 1854년 옴스크 감옥에서 4년 수형 생활을 했다. 감옥 내에선 성서외의 출판물이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성서에 대한 깊은 독서과 감옥에서 직접 맞댔던 죄수와 민중들의 삶이 그로 하여금 사회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 사상적으로 변화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감옥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죽음의 집의 기록>을 펴낸다.
출소 후 세미팔라틴스크 수비대에서 4년 간 사병으로 근무하며 마리야 이사예바를 만나게 된다. 당시 남편이 있었던 그녀는 1857년 남편이 병으로 사망하자 도스토예프스키와 결혼하게 된다. 그후 1859년 페테르부르크로 귀환하여, 10년에 가까운 문학적 공백을 깨고자 의욕적인 작품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 2에서 계속